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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요약

by veritas79 2021. 4. 26.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단순히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자가 가진 마음의 성질들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방식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 지칭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이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잡았던 시대에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라는 과학적 혁명을 제시한 사람이다. 칸트 이전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대부분 인간이 세계에 대해 수동적인 정보수용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칸트는 세계의 지각자로서의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경험에 대해 일정한 형태를 부여한다고 논증했다. 인간은 세계를 인과관계, 선후관계, 시공간적 개념 등을 통해 경험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즉, 원인과 결과 및 시간과 공간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지각자의 주관에 의해 부여되는 것들이다. 장밋빛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세상이 분홍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착용하는 안경이 우리의 모든 경험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비판


칸트는 이성의 절대성에 대해서 경계한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가 이성만을 가지고 실재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상에 대해서 비판을 제시했다. 칸트는 지식이란 감각경험과 지각자의 개념들 양자를 모두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라도 없다면 무의미하며, 특히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은 경험에 의해 확증되지 않는 한 무가치하다. 즉, 순수한 이성은 초월적 실재의 본성에 접근하는 데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경험주의와 지식


데이비드 흄을 비롯한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지식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바로 관념에 관한 지식과 사실에 관한 지식이 그것이다. 관념들의 관계는 정의에 따라 참이 되는 지식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모든 호랑이는 동물이다'와 같은 지식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호랑이를 직접 경험해보지 않아도 이 지식이 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식은 정의에 의해 성립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동물이 아닌 호랑이를 발견했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호랑이의 의미를 혼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는 '모든 호랑이는 동물이다'와 같은 진술을 '분석적'진술이라 불렀다. 흄이 제시한 또 다른 종류의 지식은 '경험적'지식이다. 예를 들어 '몇몇 사람이 독서를 하고 있다.'와 같은 진술이 그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관찰을 하지 않고서는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할 수 없는 진술이다. 흄에 따르면 진술은 분석적이거나 경험적이어야 한다. 만약 두 가지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진술이 있다면, 그 진술은 인간의 지식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한다.


선천적 종합


칸트는 흄의 저작을 읽고 나서 세 번째 유형의 지식을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선천적 종합으로서의 지식이다. '종합적'이라는 말은 '분석적'이라는 말에 대비되는 용어다. 만약 하나의 진술이 정의에 의해서 참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그것은 종합적이다. 한편, '선천적'이라는 말은 경험 여부에 관계없이 참임을 알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지칭한다. 이 용어는 경험으로부터 얻어짐을 의미하는 '후천적'이라는 말과 대비된다. 경험주의자들은 선천적 종합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칸트는 이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세 가지 지식


칸트가 인정한 세 가지 지식은 선천적 분석, 후천적 종합 그리고 선천적 종합이다. 선천적 분석은 '모든 호랑이는 동물이다'와 같은 진술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진술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반면에 후천적 종합은 '모든 사람은 안경을 쓰고 있다'와 같은 경험적 판단의 영역을 말한다. 이 판단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그러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선천적 종합, 즉 경험 여부에 관계없이 참임을 알 수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판단이다. 선천적 종합의 예는 '모든 사건은 반드시 원인을 가진다'나'5+2=7'과 같은 진술을 포함한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분석적이지 않다.


현상과 물자체


칸트는 세계를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세계와 그것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를 구분한다. 경험세계는 현상을, 실재는 물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물자체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현상에 대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사변은 처음부터 내재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에 따르면 인간이 언제나 세계에 대한 감각정보의 수용적 수동자인 것은 아니다. 칸트는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말로 인간이 감성과 오성능력의 개발에 집중할 것을 주장한다.


시간과 공간


시간과 공간은 물자체에서 발견되기보다는 우리의 경험적 세계에 존재하는 성질들이다. 즉, 시간과 공간은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의 특성이 아니라 순전히 지각자에 의해 부여되는 성질의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그러한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이 가진 지각들을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범주


칸트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사고의 틀로 12가지의 범주를 제시한다. 이 범주들은 선천적 개념들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할 범주들을 활용하여 직관을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범주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기 위한 필연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러한 범주들은 경험의 주체들로부터 독립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것들은 의식하는 주체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지 물자체 또는 실재의 특성은 아닌 것이다.


선천적 연역


순수이성비판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매우 난해한 절이 하나 있다. 바로 범주의 선천적 연역에 관한 논증이다 . 만약 이 논증이 타당하다면 칸트는 회의주의가 자기파괴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칸트는 모든 경험은 그것이 범주와 합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경험은 단순히 각 개인의 주관적 지식이 아니라 세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회의주의자들은 어떤 경험이든 그것이 외부세계에 대한 진정한 경험임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칸트에 따르면 회의주의자들의 주장 또한 경험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주장을 봉쇄하는 셈이 된다. 즉, 외부세계는 언제나 범주를 통해 지각되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을 가지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므로 회의주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경험을 가진다는 사실에 의해 당연히 전제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범주의 존재를 선천적으로 논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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