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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요약

by veritas79 2021. 4. 24.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주제는 크게 네 가지이다. 첫 번째 주제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 관한 추상적인 논의이다. 두 번째 주제는 앞에서 논의한 주제를 확장하여 과학적으로 기술되는 세계를 초월한 더 깊은 실재의 존재에 관한 주제를 다룬다. 여기서의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로, 우리가 스스로의 신체적 활동을 관찰할 때 얼핏 들여다 볼 수 있다. 세 번째 주제는 예술에 관한 낙관적인 논의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예술은 의지로서의 세계의 여러 모습들을 드러내주는 의지활동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주제는 인간의 근원적 고통에 관한 비관론이 제시된다. 인간은 스스로의 본성으로 인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우리가 욕망을 버리고 금욕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약간의 희망은 존재한다.

 


표상으로서의 세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문장은 경험은 언제나 지각하는 의식의 관점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는 실재의 궁극적인 본성에 직접 다가간다기 보다는 세계를 우리 자신에게 표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상의 세계는 우리에게 사물의 참된 본성에 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없다. 여기서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관한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포함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견해처럼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과 물자체라고 불리는 근원적 실재를 구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재가 바로 의지로서의 세계를 의미한다.


의지로서의 세계


의지로서의 세계는 인간에게 지각될 수 있는 것인가? 의지로서의 세계는 일면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의 신체를 움직이기 위한 활동을 할 때 의지로서의 세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의지는 신체적 활동과 분리되지 않으며, 오히려 의지는 이러한 운동의 한 측면이다. 즉, 우리가 스스로의 움직임을 의식할 때 우리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넘어서 물자체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의 신체를 표상이자 의지로서 경험할 수 있다.

 


예술


예술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미적 관조는 인간을 의지활동의 가차 없는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즉, 예술작품의 감상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고통과 고민, 근심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천재적 예술가들은 스스로 무관심적 감상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고, 동시에 자신이 체득한 경험과 감정을 작품의 감상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지각한 플라톤적 이데아에 대한 경험을 작품을 통해서 외부로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운 대상과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본성과 실재의 물자체에 최대한 가까이 있다. 이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견해는 플라톤의 견해와 극명하게 갈린다. 플라톤은 예술작품을 이데아에 대한 불완전한 모방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한 반면, 쇼펜하우어는 예술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칭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음악은 세계를 표방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의지의 모방이다. 그래서 음악은 우리에게 본성적 실재를 보여줄 수 있다. 음악은 특정한 맥락에 놓여 있는 개인적 차원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분리된 본질적 차원의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검증이 불가능한 추상적 논의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물론 쇼펜하우어도 음악이 물자체에 관한 지식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의 견해가 검증불가능하다는 비판을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의 설명과 이론을 상기하면서 직접 음악을 들어볼 것을 권유한다. 우리가 직접 음악을 들어본다면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생물학적 체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들, 그리고 개인적 성격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의지, 즉 물자체는 전적으로 자유롭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결정론적인가? 인간은 결국 결정되어 있는 동시에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주로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물자체가 아닌 현실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행위가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은 쇼펜하우어의 비관론적 인간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고통과 구원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인간에게 지속적인 행복이란 불가능하다. 물론 인간은 의지활동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의욕하는 것을 얻을 때 인간은 잠시나마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잠깐만 맛볼 수 있는 열매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 전체를 조망해보면 우리는 불행하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실재의 참된 본성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의지로서의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오래도록 벗어날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적어도 미적 관조의 상태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첫 번째 조치는 다른 사람의 피해가 곧 자신의 피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현상의 단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구분하지만, 실재의 세계에서는 타인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다. 나아가 쇼펜하우어는 이 책의 말미에서 극단적인 조치를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금욕주의'이다. 금욕주의자는 다른 무언가를 탐욕하지 않으며 소박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간다. 이는 스스로의 욕망을 없애고 궁극적으로 의지를 극복하게 만든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인간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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