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요약

by veritas79 2021. 5. 1.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철학적 탐구》는 마음의 양식을 쌓으며 여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독자들이 편리하게 소비할 수 있도록 잘 정돈된 내용들을 제공하기보다는 독자들의 두뇌를 계속 자극하여 스스로 사고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의도는 비트겐슈타인의 작문습관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글은 우회적이고 파편적이며, 주제를 마음대로 건너뛰기도 한다. 그는 난해한 철학적 물음들에 직접 대답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예시나 이야기를 통해 답을 암시한다. 단서는 주어지지만 함축적 의미는 불분명하며 다채로운 비유들이 있지만 이것을 해석하는 일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와의 관계


 이 책은 번호를 매긴 일련의 간결한 서술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이 가진 사고능력과 논리의 한계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시적인 은유와 잘 결부시킨 책이다. <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그의 최종적인 선언으로 가장 유명하다. 이것은 실천적인 격언이라기보다는 사고의 한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진리들은 대부분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초월한 영역에 있다. 이러한 진리는 말로 표현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철학적 탐구>는 <논고>에 나타난 견해들을 비판한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최근 사상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논고를 철학적 탐구의 서론으로 출판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철학의 본성


 기존의 철학자들에게는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가? 기존의 철학자들은 언어가 할 수 없는 일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무리하게 시도하다가 스스로 덫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언어의 마법에 걸렸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가 휴가를 떠날 때 발생한다"라고 묘사한다. 즉, 철학적 문제는 언어를 부적절한 맥락에서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을 통해 언어의 실제적 사용을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구체적인 치료법은 현실 속에서 언어의 기능을 살펴보는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사용되는 몇 가지 방식들을 확인시켜줌으로써 사고와 유의미성의 한계들에 대해 논의한다. 이러한 방법의 많은 부분은 언어의 본성에 관한 잘못된 이론들을 제거하는 일을 포함한다. 대규모의 이론을 정립하려는 기존의 방법은 사물의 본질이 발견될 수 있다는 틀린 가정에 의존한다는 문제가 있다.

 


사용으로서의 의미


 비트겐슈타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 습득에 관한 설명을 비판한다. 즉, 대상을 가리키고 그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언어를 습득한다는 설명을 공격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단어란 대상의 이름이며 결합된 단어의 고유한 기능은 실재를 기술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의 뜻을 가르치기 위해 어린 아이에게 사과를 보여주며 "이것이 사과다"라고 말하는 방법을 직시적 정의에 의한 가르침이라 부른다. 이는 해당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을 직접 가리키는 방법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방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것이 모든 언어 습득의 기초가 된다는 견해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예컨대, 직시적 정의는 상당한 배경 설정을 요구한다. 아이는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손짓이 사과의 색깔이나 모양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직시적 정의는 대상이 되는 사물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허용되는 것이다.


언어게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어 게임이 의미하는 바는 언어의 사용에는 다양한 규칙에 의한 작용들이 있고 이것들 안에서 언어가 기능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다양한 사용들을 통해 발전된 사회적 규약들 안에 내재되어 있다. 말들은 언어 사용의 맥락인 현실적인 삶의 형식에서 벗어나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가족 유사성


 언어의 덫에 걸리는 흔한 경우는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게임'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게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게임들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성질을 지시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가정에 오류가 있음을 주장한다. 모든 게임이 공유하는 본질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비유가 바로 '가족 유사성'이다. 우리가 알기에 흔히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닮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공통성질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 전체에서 단일한 공통성질이 발견된다기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유형의 유사성들이 중첩적으로 관찰된다. 당신은 아마 머리카락 색깔은 형제와 닮았고, 눈의 색깔은 어머니와 닮았으며, 당신의 형제와 어머니는 코가 서로 닮았을 수 있다. 세 명의 가족구성원이 어떠한 단일한 성질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들 사이에 가시적인 가족유사성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게임'이라고 불리는 많은 활동들, 즉 축구, 카드놀이, 컴퓨터 게임, 바둑 등의 게임들이 모두 공유하는 하나의 공통적인 본질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게임'이라는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중첩되는 유사성을 지칭하기 위해서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한 개념이 바로 '가족 유사성'이다.

 


사적 언어 논증


 철학적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적 언어 논증이라고 알려진 내용의 비평과 예증이다. 사적 언어 논증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들을 하나의 집합체로 통합한 후 일정한 논증을 추출해내는 일이다. 이 논증을 이해하기 위해서 비트겐슈타인이 공격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를 기점으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마음의 본성에 관한 탐구는 자기 자신의 경험을 고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가정했다. 예를 들어 나는 당신이 아픔을 느낀다는 것보다 내가 아픔을 느낀다는 것을 더 확실히 안다. 나의 경험은 나만이 알고 있으며, 당신의 경험은 당신만이 알고 있다. 그 누구도 나의 생각이나 감정들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견해를 반박한다. 기존의 견해는 사적 언어의 가능성에 의존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언어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사적 언어란 오직 한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언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사적 경험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언어를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사적인 직시적 정의를 사용해 우리의 경험에 이름을 붙인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언어는 어디까지나 공적이며 말의 적용과 재적용을 위한 기준도 공적이다. 즉, 어떠한 사적 언어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이 사람들이 감각과 경험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의 관점에서 보면 필연적으로 사적인 경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의 상자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 우리가 '고양이'라 부르는 동물이 들어 있다고 상상해보자.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상자 안을 들여다볼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상자 안을 들여다봄으로써 고양이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경우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상자 안에 동일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고양이'의 의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논증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논증은 데카르트에 의해 제시된 마음에 대한 그림은 유지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언어의 사적인 영사실에서 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언어가 사고의 한계를 설정하며 언어는 본질적으로 공적인 현상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이 모든 점에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가 전통적인 설명을 대신하여 제안하는 가설은 다음과 같다. '아픔'과 같은 말은 사적인 감각들에 대한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학습된 아픔이나 행동의 일부일 뿐이며 그 말의 적용을 위한 공적 기준을 가질 것이다. 한 어린아이가 다쳐서 울 때 어른들은 그 아이에게 아픔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어린아이는 울음의 대체물로서 아픔에 관해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픔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각을 기술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픔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반응형

댓글